▲ 인천지역 가씨들의 구심점인 '소주가씨 인천 종친회' 주축 멤버인 가승노 인천 종친회장(오른쪽)과 가용섭 전국소년소녀가장돕기 인천시민연합회장은 인천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말했다.

충남 태안·서산 몰려 살던 가씨
한국전 직후 생계찾아 인천으로
제2 고향서 1983년 종친회 설립
가승노 회장 등 종친 매월 봉사도


#다음 대화를 읽고 A가 말한 뜻과 같은 내용의 문장을 고르시오.

A: 가가 가가가?
B: 네. 가가 갑니더.

1 가씨성을 가진 그애는 갔나?
2 가씨성을 가진 그애가 그애 맞나?

경상도 토박이가 아니면 답하기 힘든 이 문제에서 어쩌면 정답보다 흥미를 끄는 건 '가'씨의 존재 유무다. 위 사투리를 사용하는 대표 도시인 부산·대구에는 가씨 성 쓰는 사람이 150명 정도 된다.

가씨 선조는 경상도, 후손들은 충청남도 태안과 연이 깊다.

국내 가씨 대부분은 소주가씨(蘇州賈氏)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명나라 장수 '가유약'이 시조다.

가유약은 1600년 부산 포구 전투를 위해 아들 '가상'과 손자 '가침'과 함께 왔다. 가유약과 아들 가상은 부산에서 전사하고 손자 가침은 울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후손들은 충청도 태안으로 터를 옮겨 정착했다. 가씨들은 이후 태안을 중심으로 충효의 가통을 이어왔다.

그런데 인천에도 가씨들이 많다. 전체 가씨가 100명이라면 14명은 현재 인천에 거주한다. 2000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소주가씨 9025명 가운데 13.7%인 1243명은 인천지역에 분포해 있다. 한국전쟁 직후 생계를 위해 맨주먹 하나로 인천 가는 목선에 몸을 실은 이들이 그 뿌리다.

▲'칠복호', '은하호'가 이어준 인천과의 인연

1900년대초까지만 해도 가씨들은 충남 태안과 서산에 모여 살았다. 17세기무렵 조상들이 다진 터에서 자연에 순응하며 3세기 넘게 지낸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충청도 지역에 극심한 생활고가 덮쳤다. 충청 내륙은 생계를 위해 주로 땅길로 상경했다.

가씨가 많이 살던 서해를 낀 태안과 서산 인구는 배 타고 인천으로 많이 왔다. 충남 서산시 구도항에서 당시엔 목선이던 '칠복호', '은하호' 타면 하인천으로 갈 수 있었다. 인천에서 어느 정도 정착한 선발대는 자신의 동생이나 사촌, 이웃들을 불러들였다. 이곳에서 결혼해 자식을 낳고, 증손자까지 본 경우도 꽤 있다.

국내 인구 중 가씨 비중이 0.01%인데 비해 인천은 0.05%로 비교적 높은 이유다.

1983년 설립한 소주가씨 인천 종친회는 지금까지 지역 가씨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국민은행 숭의동 지점장을 지낸 고(故) 가열 인천 종친회 초대 회장이 앞장서 조직했다.

지금 회장은 부평구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가승노(61)씨다. 가승노 회장은 "1960년대, 1970년대 인천은 일자리도 적고 텃새도 심해 생활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먼저 자리 잡은 선배들이 우릴 이끌어 줬다"며 "가씨 특유의 끈기를 발휘해 맨주먹으로 온 인천에서 가문을 알린 경찰서장이나 기업가, 외식업자들도 있다"고 말했다.

제2의 고향 인천, 이젠 베푸는 가씨 되겠다

가승노 회장은 전공을 살려 종친회 사람들과 매월 주안요양병원에서 이발 봉사를 한다. 자신이 운영하는 이발소에선 노인들에게 정상 가격의 절반이나 무료로 이발을 해주기도 한다.

종친회에서 15년 넘게 총무일을 담당한 전국소년소녀가장돕기 인천시민연합 가용섭 회장은 지난 10년 동안
지역 소외계층 어린이들의 먹고 사는 것을 도와줬다. 인천 가씨 중엔 이 정도 봉사는 보통 수준이라는 게 이들 설명이다.

가승노 회장은 "250여명 종친회원들은 가문 문제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우리의 삶이 담겨 있는 지역에 대한 애정도 크다"며 "제2의 고향 인천에서 오다가다 가씨끼리 만나면 위, 아래 따지기 위해 나이 대신 몇 대손인지부터 묻는다. 우린 한 가족이다"라고 말했다.


/글·사진 김원진 기자 kwj799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