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태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동요(童謠)는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아이들의 노래이기에 그것의 목적은 놀이와 관련돼 있다.

동요를 유희요(遊戱謠) 정도로 여기지만, 그것의 생성 및 전파 과정을 생각하면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른바 고전에 등장하는 동요는 미래의 일을 예언하거나 현실의 상황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에 그렇다.

예컨대 "요(堯) 임금이 천하를 다스린 지 15년, 천하의 다스림을 알 수 없자 변장하고 강구에 나아가 아이들의 노래를 들었다"(<열자> '중니편')를 비롯해 선화공주가 쫓겨나기 전에 불린 <서동요>, 숙종 때의 희빈 장씨와 관련된 <미나리요> 등처럼 문학류(類)와 역사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은 <동아일보> 1923년 12월 1일자 '지방소식 인천호'에 실린 '인천지방 유행동요'이다.


인천 생활 십 년에/ 모찌떡 한 개를 못 먹고/ 제물(濟物)에 살짝 들어선다/ 인천이라 제물포/ 살기는 좋아도/ 일본인 등살에 나 못살네/

 인천에 방천에 다 큰 처녀/ 선채를 받고서 죽었다네/ 봉채근난 받아서 염습하고/ 상여(喪輿)를 메고서/ 돌아보니/ 북망산천이 여기구나

화자가 제물포에 온 지 십 년 지났다. 고향땅을 떠나 '살기 좋다'고 소문난 곳으로 온 것이었다. 하지만 모찌떡 하나 사 먹지 않고 살았건만 그곳은 살기 좋은 공간이 아니었다. 이유인 즉슨 일본인들의 등살을 견디기 힘들어서였다.

그럼에도 화자는 십여 년을 제물포에서 악착같이 버텨냈다. 그리고 다 큰 처녀가 되어 혼담이 구체적으로 진행되다가, 화자는 봉채(封采)와 선채(先綵)를 받은 후 죽음을 맞았다.

신랑 측에서 신부 쪽에 보내는 신랑의 사주와 편지, 푸른색과 붉은색 비단을 받았건만 기뻐할 틈도 없이 죽었다는 것이다. 비단으로 혼례복을 지어 입어야 마땅하건만 그것으로 시신을 감싸 염습을 했으니 화자의 삶이 딱하기만 하다. 결혼이 출발하기 전에 감당하기 힘든 비극이 닥친 모습은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조차 감내하기 힘든 비극적 상황이었다.

어찌보면, 노랫말에 나타나듯 일본인들에게 살기 좋은 곳이되 조선인에게는 '북망산천이 여기'인 곳은 제물포라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 듯, 선채를 받고 죽은 여성의 모습 위로 개항장을 배회하던 채동지라는 걸인(乞人) 이야기가 오버랩 된다. 채동지는 1910년경에 인천항으로 와서 1937년경 웃터골 부근에서 사망했다. 채동지가 걸인으로 인천항을 배회할 무렵, 전국적으로 걸인 관련 기사가 폭발적으로 늘었는데, 이 또한 1920년대 제물포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참고로 1연의 "인천이라 제물포/ 살기는 좋아도/ 등살에 나 못살겠구나"는 1894년 8월 일본 도쿄에서 간행한 조선어 회화책 <신찬 조선회화(新撰朝鮮會話)>에 수록돼 있는 '인천 아리랑'의 구절과 거의 같다. "인천 제물포 모두 살긴 좋아도/ 왜인 위세로 난 못살겠네(인쳔 쳬밀이(제물포) 사, 살긴 죠와도/ 왜네 할가에 나 못사라)"가 그것이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조선어 회화책에 '인천 아리랑'을 실은 이유에 대해 일본인들을 미워하는 인천사람들의 인심을 미리 알려주고 행동에 조심하도록 경고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위의 동요에서 중국 상인 '객가[Hakka ; 客家]'인지 '인천 아리랑'에 나타난 대로 '왜네[왜인]'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인천 아리랑'의 파생 버전에 해당하는 황해도 '풍자요'에서도 "왜노(倭奴)의 등살에 못살겠네"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きゃくか]'를 일본인으로 번역 해설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