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준 경제부 기자
1918년 10월 지어진 대한민국 최초 갑문항 '인천항 제1선거'가 내년이 되면 '준공 100주년'을 맞는다. 1910년 합병 이후 조선총독부는 사도(沙島)와 세관 매립지 남쪽 해안에서 현재의 인천여상 아래쪽에 이르는 해안 사이를 매립한다. 그 중앙엔 약 3만평(9만9170여㎡) 규모의 이중 갑문식 선거를 만들어 4500t급 선박 3척을 동시에 접안할 수 있게 했다. 천문조(天文潮) 영향으로 간만 조위 차가 최대 10m에 달하는 바다 환경을 극복해 대형 선박이 수시로 선거에 들어가고 나올 수 있는 항만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인천항 제1선거는 자연의 힘을 뛰어넘은 국내 최초 갑문항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침략자의 손에 만들어진 항만 축조물이란 운명을 안고 세상에 나왔다. 제1선거 덕분에 인천항은 전천후 상업항으로 각광을 받는다.

이후 1960년대 경제 개발 시작과 더불어 물동량의 급속한 증가로 1974년 박정희 정부 때 동양 최대 규모 갑문식 선거인 '인천항 제2선거'가 축조됐다. 인천역과 월미도, 소월미도, 연안부두로 둘러싸인 바다를 매립해 인공호수를 조성했고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 현재의 갑문을 달았다. 갑문 안쪽 전체가 선거가 됐고 내항은 8개 부두에 48척의 선박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추게 됐다. 5만t급과 1만t급 갑거 2기, 충수시설 등으로 이뤄진 갑문시설은 프랑스 소그리아(sogreah)사의 설계 감리와 국내 시공사인 동아건설과 대한조선공사의 기술력으로 완공됐다. 제2선거의 탄생은 제1선거의 역할을 선거에서 부두로 바꿨다. 현재의 1부두 쪽에 있던 제1선거의 갑문은 헐렸지만 '제2선거가 제1선거를 품고 있는 형태' 덕분에 자연스럽게 '부두 기능'이 유지된 것이다.

3년 전 인천항만공사는 제2선거 준공 40주년을 기념해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는 갑문을 이틀간 개방하는 행사를 치렀다. 최근엔 제2선거 갑문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홍보영상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반면 준공 100주년을 앞둔 제1선거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100년 가까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인천항 제1·2선거. 일부만 남아있는 제1선거 축조물과 지금의 제2선거를 잘 보존해 인천의 아픔과 발전사가 담긴 역사이자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의 상징물로서 그 가치를 널리 알리는 데 지역사회가 움직여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