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백령도에서 '해녀'를 만났다. 두무진 포구에 사는 김호순(69) 할머니다. 그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부터 물질을 했다. 작고 여린 손으로 미역이나 우뭇가사리를 따서 자신의 학용품을 사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도 할머니도 해녀였다. 억척스러운 섬 여자의 인생을 대물림 받았다.

그는 30여년 전 백령도로 '출장' 왔다. 그 바다 속에는 전복, 해삼, 성게 등이 지천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 앉아 숨비 소리를 지금껏 백령도 바다에 내뿜고 있다. 현재 그 같은 해녀가 너 댓 명된다.

제주도를 떠나 다른 지역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를 '출향해녀'라고 한다. 1930년경에는 무려 4000여명이 바깥물질을 위해 제주를 떠났다. 남해 여수는 물론 동해 울릉도 그리고 서해 먼 바다 백령도까지 건너가 자맥질을 했다. 당시 1600명의 제주해녀가 일본으로 진출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들은 일본해녀 '아마'에 비해서 품삯이 싸고 추위에 강해 일본 어촌계의 스카우트 대상이었다. 그들은 중국 다렌과 칭다오, 심지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잠수 영역을 넓히기도 했다. 제주해녀는 지난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

인천의 해녀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된 듯하다. 1924년 5월 초 황해도 해주 용당포 앞바다에서 90여명이 조난을 당했다. 총독부는 구축함까지 동원해 수색했지만 성과가 없자 인천에서 잠수부와 '해녀'를 데려다가 수색했다. 소무의도 앞에 작은 무인도가 있다.

1969년 인천에 거주하는 두 사람이 관광시설로 쓸 섬을 찾아다니다가 지적도에도 표시돼 있지 않은 이 섬을 '발견'했다. 세무서에 국유재산 발견 신고를 하면서 섬 이름을 '해녀도'라고 붙였다. 1927년 인천에서 창간한 문예지 '습작시대'에는 김동환의 시 '월미도 해녀요(海女謠)'가 실렸다. 인천 앞바다와 해녀를 잇는 단서들로 추정된다.

최근 인천시는 '매력 있는 애인섬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68개 섬에 대한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다. 이참에 인천해녀에 대한 연구와 민속 수집 등을 해보면 어떨까. 인천 앞바다에 우리가 몰랐던 '진주'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