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로 시작된 비옥한 땅엔 14면 275구가 있었네
'곡물 월급' 받던 구장 … 면장은 '술상무'
▲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농경지와 어장이 비옥한 이 땅에 우리나라의 시조 단군왕검은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강화도를 민족의 성지라 부르는 이유이다. 사진은 강화읍 전경. /사진제공=강화군청

강화도가 '민족의 성지'라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강화도엔 우선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의 흔적이 역력하다. 제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올린 '참성단', 그의 세 아들이 축조한 '정족산성'.

이 같은 사실만 봐도 강화도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땅이라 할 수 있다. 단군은 어째서 고조선의 그 많은 땅 가운데 강화도를 택한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강화도의 비옥한 자연환경 때문일수도 있을 것이다.

코넬리어스 오스굿 역시 단군에 주목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강화의 이야기는 기원전 3000년 전의 단군신화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한국인의 조상인 단군은 두 개의 제단을 지었는데 하나는 강화도 남쪽 마리산에, 다른 하나는 첫 번째 제단에서 북쪽으로 12마일쯤 떨어진 1000피트 정도의 봉천산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남쪽 마리산의 것은 '참성단'이고, 봉천산에 있는 것은 '봉천대'를 가리킨다. 여기서 참성단은 단군신화와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지만, 봉천산에 있는 봉천대는 단군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 보인다. 봉천대는 고려시대 축리소에서 나라에서 제천의식을 행하던 제단으로 사용됐다.

고려 중엽 봉씨의 시조 봉우의 5대손인 봉천우가 선조의 발상지인 하음에 조상을 구해준 은혜를 찬양하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쌓은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화강암을 다듬어 쌓은 정방형 사다리꼴 모양으로, 밑넓이 7.2m에 높이는 5.5m이다.

강화도는 남북을 통틀어 나라의 인후라고 할 수 있다. 고려왕조가 배수의 진을 치고 결사항전을 벌인 우리나라 최후의 땅, 병자호란, 신미양요,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온갖 국난을 가장 앞에 서서 막아낸 땅도 강화도였다.

강화도는 한강 하구와 황해의 경기만이 만나는 우리나라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만나는 어귀에 위치한 강화도는 비옥한 어장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고 있다.

강화도 땅은 기름진 편이어서 경작지가 연해지역안의 충적지와 간척지, 저구릉지를 합해 강화도 전체 면적의 43.6%를 차지하는데 그 중 39.6%가 농경지다. 강화군은 강화섬쌀을 비롯해 인삼, 고추, 영지버섯, 감, 순무 등 농산물과 새우젓, 김 등이 특산물이다.

강화도엔 현재 1읍 12면 186개리에 6만8010여 명이 살고 있는데 1947년은 조금 달랐다. 오스굿의 기록에 따르면 1947년 당시 강화도에는 14개의 면과 부락이라고 할 수 있는 '구'가 275개 존재했다. 구는 지금의 '리'이다. 한 구엔 6개의 반이 속하는데 강화도엔 1565개의 반이 있었다.

1947년 강화군수는 경기도 지사가 임명했으며 경기도지사는 남한 임시 입법부의 승인을 얻은 뒤 정부가 뽑았다. 군은 면장을 뽑았으나 1946년11월15일 포고에 의해 면장은 80명의 주민에 의한 선거에 의해 선출됐다.

면장은 정부로부터 월급을 포함해 경제적 지원을 받는 정치적 피라미드 조직의 최하위 직책이었다. 이에 비해 구장은 면사무소가 공출한 곡물의 일부를 급여로 받았다. 이는 다시 반장과 나누어야 했다.

반장은 마을에서 중요한 인물이 아니며 나이가 어려 많은 짐을 지고 갈 수 없을 때조차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마을의 수장들은 힘이 없으며 단지 시스템의 상징, 중앙집권화의 상징으로서만 존재했다.

면장은 상급자들을 기쁘게 해야 하는 동시에 지역공동체의 진정한 지도자들과 접촉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술을 계속 마시다가 죽지 않는다면 그는 행운아라고 적은 것을 볼 때 당시 행정조직의 술문화를 추축할 수 있다.

오스굿은 강화군의 경찰서장은 경기도의 상관들을 통해 서울의 명령을 따라야 했으며 경찰서장은 큰 마을에 있는 경찰의 사적인 숙소에서도 명령을 내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쉽게 말해 공과 사가 선명하게 구분돼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70년이 지난 지금 강화군은 통일시대의 수도권 관문도시, 남북한을 연결하는 서해안 경협벨트의 최적지로 떠올랐다. 교육에 있어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 현재 21개의 유치원, 23개의 초등학교, 11개의 중학교, 8개의 고등학교와 2개 대학교, 1개 대학원이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이상복 군수가 말하는 '오늘의 강화'

"역사·자연 숨쉬는 제1의 관광도시"


이상복 강화군수는 "유구한 역사·문화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간직한 강화군은 2500만 수도권 시민의 배후 도시로서 수도권 제1의 관광·휴양도시, 나아가 통일시대의 수도권 관문도시로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강화도는 어떤 땅인가

―한반도 중심에 위치한 강화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선사시대 고인돌에서부터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마니산 참성단 그리고 39년간 고려의 도읍지였던 고려궁지, 강화산성, 외규장각,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등 5000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으로 항몽시대부터 근대사까지 국난 극복의 의지를 불태운 제2의 수도로서 조국 수호와 국난 극복의 현장이다.

이와 함께 천연림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산, 갯벌 등 자연과 역사·문화가 어우러진 곳으로 수많은 역사 유적과 이야깃거리가 있는 역사·문화 관광지이고, 세계 5대 갯벌인 강화 연안 갯벌을 비롯해 마니산, 고려산 혈구산, 나들길 등 자연 자원이 산재해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강화군은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며, 면적은 인천광역시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해풍의 따스함과 자연의 신선함 속에서 생산된 강화섬쌀, 강화약쑥, 강화순무, 강화인삼, 강화속노랑고구마, 강화새우젓 등은 전국적으로 그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강화군의 2017년 위상을 말해달라

―강화군은 지난해 1월 수도권에서는 처음으로 2018년도 올해의 관광도시로 선정됐다. 올해의 관광도시 선정은 강화군의 매력과 잠재력을 정부가 인정한 것이며, 수도권 최고의 관광도시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올해의 관광도시는 강화군 관광산업이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될 것이며, 강화군이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수도권 최고의 관광도시로 거듭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강화군은 통일의 전초기지로 최적의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으며 개발 잠재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곳이다. 통일을 준비하는 정책 수립 단계부터 강화군이 주무대가 되어야 하며 통일을 대비한 미래지향적 교통·인프라 정비 및 확충이 필요한 지역이다.

따라서 강화~영종간 교량 건설, 광역 교통망 확충, 규제 완화 등 통일을 대비한 정부 주도의 적극적 지원이 필요한 곳으로 통일시대의 수도권 관문도시 강화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총력을 다해 나갈 것이다.

이 군수는 1954년 강화군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뒤 제22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했다. 1982년 국방부 방산국 국제협력과 행정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래 2010년 행정안전부 지방행정연수원장을 끝으로 명예퇴직한 뒤 2014년 민선6기 강화군수로 선출됐다.

/왕수봉 기자 8989king@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