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매미가 울고 있다. 계절의 경계에서 게워야 할 사연이 많은 사람처럼 극성스럽게 울어댄다. 휴가를 가지 않은 친구들 서넛과 껄쩍지근했던 마음을 자유공원 연오정 바닥에 내려놓았다. 매미의 울음을 감지했을 땐 이 지루한 폭염의 임계점도 얼마 남지 않았다 했는데, 한꺼번에 스테레오처럼 몰아치다보니 어둠이 깊어갈수록 더 큰 소음으로 다가왔다.

친구들은 예전과 달랐다.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월의 정석을 밟는 순간, 경제적 윤택도 일시적이고 건강 또한 변화 대처의 날개짓이 버거워 늦은 밤이 두렵다는 농담도 나왔다. 그렇게 한 여름 밤에 만난 친구들은 '119'를 한결같이 외쳤고 불룩 튀어나온 배를 어루만지며 귀갓길을 재촉하기도 하였다. 육화된 매미 성충처럼 말수는 많아졌지만, 성실함을 몸소 실천하려는 결연함도 살짝 엿보였다. 한자리에서 시작해 1차로 끝내고 9시 이전에는 집에 들어가자는 우스개가 '119'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늘어난 것이 몇 가지 있다. 그 첫 번째가 욕설이다. 욕설의 미학이라 군더더기 붙여 말하면, 닫혀 있는 사회에 대한 불만을 뭉뚱그려 한마디로 표현해볼 수 있다는 것에 사족을 달아본다. 사람관계에도 마찬가지다. 부조리하고 복잡한 사회에서 불이익과 몰이해에 처한 상황을 일시적이나마 단박에 진정시킬 수 있는 효과음으로서 제격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합리화 내지는 자기정화의 기치를 들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소극적 의지의 발로일 뿐, 문제를 야기하거나 확대시킬 의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의 대리만족 정도로 해두면 그럴 듯한 해석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요즘 늘어난 욕설의 대부분은 절친한 선배로부터 전수받았다는 점이다.

평생을 연구와 강의를 일삼아온 딸깍발이 서생 주제에 주먹질을 배워본 바도 없겠고, 남에게 싫은 소리조차 못해 푸념에 넋두리를 하듯 내뱉던 말들이 나팔관에 똬리를 틀어버렸기 때문이다. 뭐, 이렇게 자평하면서 포춘 쿠키를 연달아 깨먹으며 읽어야 했던 오늘의 운세처럼 입이 근질거릴 정도가 되었으니 이는 분명 무력감이 가장 큰 탓으로 보인다. 여하간 묘한 쾌감과 함께 진중하면서 격식과 예의를 권하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전용하는 것을 보면 중독성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두 번째가 늘어난 뱃살이다. 중년의 최대 불편함, 특히 남성성을 지닌 쉰 세대 가운데, 늘어진 뱃살로 제 소변의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허리 굽히기도 어렵고 뭣 좀 먹었다 하면 눕고 싶고, 움직이는 것보다는 틈만 나면 앉아 있고 싶은 욕구가 커졌다는 원인이 진단되고 있다. 의지력 문제이기에 앞서, 엔간히 바지런하지 않으면 그냥 가만히 있다가는 하루 볼장 다 봐버릴 정도로 만성적 피로에 젖어 있다는 점이 꼽히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편리를 좇고 보신의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우리사회의 피로 대처현상으로 보인다. 선배 세대가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안락한 노후를 보장받으려 애를 써왔건만, 정작 그 세대들은 후배 세대들과 단절돼 있고 더욱 가난해졌으며 수명은 더욱 늘어났다는 점도 고려되고 있다. 향후 20년, 한국사회가 OECD 국가 가운데 최고령 연령대로 진입한다는 발표다. 늙고 병든 부모 세대를 수발하기도 버겁고 자녀 양육과 결혼 문제 등 이중과제를 넘어 본인의 안녕마저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뼈저린 부조리함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그 사이를 지탱하는 쉰 세대들은 허망함과 대 사회적 불신이 들어찼으며 불투명한 미래 구조에 대한 저항세대로 역사에 기록될까 우려되고 있다.

베이비부머 세대를 위한 해법은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자녀 세대의 생존을 담보할 만한 미래 혁신 구조를 갈구해야 겨우 살아남는다는 것을 유산으로 남겨줘야 하는 암울함도 깊었다. 뭔가 잘 돌아가지 않는 사회일수록 추상적인 단어의 배열로 곧잘 시민사회를 무디게 만드는 것을 많이 봐왔다. 도시 곳곳에 영문으로 표기된, 정신(Spirit)·혁신(Innovation)·역동적인(Dynamic)·발산(Divergence)·재창조(Recreating)·융합(Fusion) 등의 유화적인 말로 정치권력에 순응하도록 유도해왔기 때문이다. 마치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를 연상케 하는 참혹한 현실을 마비시키는 반복적 언어의 주입현상으로 보인다. 소시민의 삶은 그저 맘 편히 하루 세끼 먹는 것에 있고, 복잡한 현실적 도그마를 벗어나 자유인으로 살기 바라는 데에 있다. 비단 쉰 세대만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 중심에 놓여 있는 자체만으로 삶의 하중을 진중하게 느끼는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좋은 날을 그려보는 시대의 경계에서 가을 전령의 대부격인 매미가 꽃을 틔운 밤나무 가지를 요란스럽게 흔들어대고 있다. 무슨 냄새를 맡을 것인가 보다, 무엇을 들으며 살 것인가 몹시 고민되는 입추 어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