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이 아직 어리고 반만 리 먼 곳에 있어 수시로 나의 이야기를 말해줄 수 없구나. 그래서 그간 내가 겪어온 바를 간략히 적어 몇몇 동지에게 맡겨 너희들이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 할 정도로 성장하거든 보여주라고 부탁하였다." 대한민국 11년(1929) 5월3일 상해 법조계 마량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김구는 <백범일지> 상권 집필을 완료했다.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윗글에 잘 나타나 있는데,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세상을 떠날 무렵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어머니 없이 남겨진 어린 두 아들은 곽낙원 여사가 키웠지만, 조선과 단절되다시피 한 상해 생활은 곤궁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어머니와 두 아들 인과 신을 일제 치하의 조선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처참한 상황까지 벌어졌다.

전 국무위원이 총사직한 상황에서 국무령에 선출(1926)된 백범은 홀로 임정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백범일지>는 이처럼 조국의 해방을 예측할 수 없고,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린 두 아들에게 아비의 행장이나마 알리고자 집필한 유서(遺書)였다. 그처럼 어려운 시기를 버티고, 조국 진군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해방은 도둑처럼 왔다.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은 정부 요인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환국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노선이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민족 분단이 확정적인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육신과 생명을 내던져서라도 분단만은 막고자 했다. 일제의 암살 위협도 견뎌냈던 백범은 1949년 6월26일, 해방된 조국에서 동포의 손에 쓰러졌다. 안두희는 자서전 <시역의 고민>에서 백범의 노선과 정치행위가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는 '용서할 수 없는 이적행위'였다고 주장했지만, 백범이 쓰러지고 1년 만에 6·25란 민족사의 비극이 발발했다. 광복절 72주년 아침, '화염과 분노'를 외치는 혈맹(血盟)과 '불바다'를 운운하는 혈연(血緣) 사이에서 우리의 비극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던 백범, 그가 떠올랐다. /황해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