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묘선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교육조교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던 지난 10월21일~22일. 아르코예술극장 무대에 섰을 때 내 안에선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김묘선 춤인생 50 인연지무'를 보기 위해 빈 자리 하나 없이 전석 매진으로 객석에 앉은 내 고국의 관객들 때문이었다. 이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지난 50년간 걸어온 무용인생을 뒤돌아보며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드디어 공연의 막이 오르고 무대로 나갔다. 내 작은 손끝 하나, 발놀림 하나까지 면밀히 주시하던 대중과 평단의 호응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큰 부피로 다가왔다. 그동안 나와 함께 걸어온 제자들의 '기원무'는 작은 무대를 광활한 평야처럼 보이게 만들어주었다.

시원의 세계, 굵은 소나기가 대지를 두드리는 듯한 북소리와 자연의 모든 색채를 모아놓은 듯한 의상에서 뿜어져나오는 군무에 객석은 환호성으로 화답해주었다. 일본과 미국에서 온 제자 7명의 김묘선류 화선무곡 역시 객석의 환호성을 이끌어냈다. "승무를 보고 울어보기는 처음"이라는 인천 구양사의 능화스님과 동국대학교 총장님이신 보광스님을 비롯한 많은 지인들이 전율을 느끼는 감동이었다고 극찬을 해주었다. "지난 50년 간, 나는 과연 잘 살아왔던 것일까." 이번 무대는 늘 화두처럼 생각하던 내 무용인생에 대해 강한 확신이 든 공연이었다.

내 예술인생의 고향은 인천이다. 인천에서 본격적인 무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1982년, 그러니까 내 나이 25살 때였다. 당시 무용은 비인기 예술장르였고, 전통무용은 더더욱 그랬다. 그 때 겁도 없이 인천에 무용학원을 개원하고 제자들을 받기 시작했다. 내게 무용은 전부였고, 나는 우리 전통무용을 세계적인 예술로 반드시 승화시킬 것이란 꿈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문화예술 자체에 대한 인식이 낮았고, 전통무용은 더 그랬다.

예를 들어 무용을 제대로 하려면 경제적 뒷받침이 돼야 하나 나는 가난한 무용인이었다. 그나마 학원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레슨비를 제대로 받아야 하는데, 무용을 한다면 레슨비를 내지 못하는 제자들까지 챙기다보니 경영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어떨 때는 라면 한봉지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허리띠를 더 졸라매고 이를 물었다. 그렇게 개인적으로 춤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노력한 덕에 1987년 이매방 선생님이 인간문화재로 지정될 때 동아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으면서 스승의 인정을 받았다. 이어 1989년에 이수자가 되었고 현재 우봉 이매방춤보존회에서 이수자 1호로 활동하고 있으니 내 춤인생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35년이 지난 지금 당시 유치원생, 초등학생, 중고생이던 제자들은 이제 중견무용가로 성장했다.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선생이 된 제자들도 있다. 그 제자들이 이번 공연에 다 출연해 스승과 함께 춤을 추어준 것이다. 인천에서 무용을 하면 인천무용가임에도 인천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외면을 받았던 설움도 한꺼번에 날라갔다.

수행과도 같았던 외로운 춤길을 걸어오며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교육조교로서 인정을 받게 된지 12년이 지났다. 태평양과 현해탄을 오가며 노력한 결과 일본과 미국의 도시 7곳에 김묘선 승무전수소를 개원했다. 나고야와 요코야마에도 내년 초 승무전수소 문을 열기로 했다.

지금 다른 나라에는 없는 문화도 만드는데, 우리는 수백 수천년 이어온 전통예술을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어떤 힘 있는 분들이 전통무용이 인기를 끄는 국민의 춤으로 되었으니 인간문화재를 해제해야 한다는 궤변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그나마 인간문화재가 있어서 전통무용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 할까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국음악과 한국무용 대학전공자들이 부족해서 폐과가 되는 현상을 보며 과연 우리 전통무용이 사랑을 받고 있는지, 정말 대중화가 된 건지도 묻고 싶다. 겉으로 보긴 화려하지만 전통문화예술을 해서는 먹고 살 수 없는 나라, 젊은층은 없고 무료티켓을 들고온 어르신들이 객석을 메꿔야 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우리 춤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무용인들이 아무 걱정없이 우리 것을 지키고 원형을 지키면서 새로운 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대우를 받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춤을 통해 인천과 우리나라를 널리 알리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김묘선의 춤인생 50주년을 살펴봐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