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구 문화체육관광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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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이라고 기억한다. 현 인재개발원에서 들었던 '인천 문학 속의 역사'라는 강의 내용이 아직도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전국 팔도의 사람이 모여 잘 사는 인천, 그 인천을 그려낸 문학은 한국인의 삶을 보는 거울이기도 했고 시와 소설 등으로 되살아나는 인천은 한국의 단면사이기도 했다.
문학작품 속의 인천이 시초로 등장한 시기를 보면 고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성(詩聖) 이규보가 계양부사로 있었던 1219년 이후 1년여 만에 지은 '계양망해지(桂陽望海志)'와 이규보가 개경으로 임지를 옮기기 직전 쓴 '계양초정기(桂陽草亭記)이다. 700년이 흐른 1928년 벽초 홍명희의 대표작 '임꺽정'에서 의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검술을 연마하는 장소로 계양산에 들었다는 구연적 강의는 아직도 머릿속 전두엽을 자극하고 있다.

부평과 계양과는 한 몸이었다. 그러다가 1995년 직할시가 인천광역시로 승격되며 경인고속도로를 경계로 분구해 남쪽은 부평구, 북쪽은 계양구로 나뉘었다. 계양구는 계양산에서 비롯됐다. '계양'이라는 말은 안남산(계양산)에 계수나무와 회양나무가 자생하므로 '계'자와 '양'자를 따서 탄생했다. 고려 고종 2년(1215년)에는 안남도호부가 계양도호부로 바뀌었다.

계양산은 1944년 인천시 최초의 도시공원(계양공원)으로 결정되면서 지금도 시 지정 제1호 공원으로 남아 있다. 계양산성에는 문학산성과 함께 인천의 역사를 상징하는 유적이 많이 있다. 초기 백제의 건국으로 알려진 문학산 일대가 인천 역사의 한 장이었다면 백제 초기의 교통과 군사 요충지로 중시했던 곳이 계양산 일대 드넓은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계양산에는 삼국시대를 시작으로 조선말기까지 유적이 많다. 계양산성의 경우 '신 동국여지승람'에 석축의 둘레가 1천937척이라고 되어 있다. 석성을 먼저 쌓고 안쪽에 흙을 다져가며 쌓은 내탁식 공법으로 축조된 테뫼식 특징의 산성이다.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 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봉의 높이가 해발 395m로 인천 내륙에서는 가장 높은 계양산은 인천의 진산이자 주산이다.

고려시대 명월사지 만일사지는 이규보의 '계양산천산조'에 앞 바다를 내려보며 자연도를 비롯한 서해를 묘사한 싯구를 생각하게 한다. 봉일사지는 조선 중기에 없어진 절이다. 현 백룡사에 3층 석탑을 옮겨 놓았으며, 개울섶에 있던 미륵불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기도 하다. 응방지를 비롯해 금륜역지의 고려 유적과 조선시대 사직단지, 권환의 묘갈, 안동 권씨의 묘역과 가문의 묘비 등이 있다.

계양구의 상징과도 같은 계양산성의 가치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자치구 출범 이후 학술조사와 정비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계양구는 1997년부터 2001년에 걸친 실측조사와 지표조사를 벌였다. 학술자료를 축적하기 위한 발굴조사를 하며 1천37기의 성내 분묘를 이전·복원정비하는 기본계획을 단계별로 시행했다. 발굴조사 결과 산성의 북문, 집수지 3개, 대형건물지 1개, 소규모 건물지 7개, 치성 2개 등 성내 시설 유적을 확인해 고무적이었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목간, 주부토 명문 기와, 원저단경호, 백제 토기편, 연화문 수막새, 자물쇠, 화살촉 등 1천여 점의 유물을 수습했다.

계양구는 계양산성의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사적 지정을 추진하는 한편 산성 인근 등산로 입구에 '계양산성박물관' 건립을 진행하고 있다. 연면적 2천㎡ 규모로 내년에 개관할 예정인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산성 전문 박물관'이다. 계양산성 발굴 유물 등 산성 관련 자료의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누구나 쉽게 계양산성의 가치와 계양의 역사를 체감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떠오를 것이다.
인천의 역사로 남을 계양산성박물관이 오래도록 사랑을 받는 문화시설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인천시민과 각계 전문가들의 관심과 지원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