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 곧 재즈 … 치유와 자유가 있는 창의적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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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zz is all of my life. I'm a jazz."
인천 구월동의 재즈 카페 '공감'에서 마련한 재즈 특별무대를 위해 지난 15일 피아노 신관웅, 색소폰 김수열, 트럼펫 최선배, 클라리넷 이동기, 드럼 임헌수, 베이스 전성식 등 국내 재즈1세대 거장들과 함께 인천을 찾은 재즈 보컬리스트 김 준은 "재즈는 내 인생의 전부이자, 재즈와 함께 살아온 내 삶이 곧 재즈"라고 밝혔다.

김준의 인천과의 인연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올림포스 호텔 2층 나이트클럽에서 매일 밤마다 공연이 있었고 그도 재즈를 부르기 위해 인천을 자주 찾았다.

"올림포스 호텔의 돌아가신 전낙원 회장과는 개인적인 인연이 아주 깊어요. 전 회장이 자기 호텔에서 재즈 공연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많이 왔죠. 전 회장이 재즈를 알고 좋아했거든요. 전 회장 아들 필립이 영종도에 큰 호텔을 짓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인천에 오니 필립도 보고싶네요."

경희대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그는 1961년 박정희 정부에서 김종필 전 총리를 단장으로 '예그린가무단'을 만들었을 때 합창단 1기 단원으로 선발됐지만 1년여 만에 예그린이 해체되면서 함께 활동하던 4명이 모여 '자니 브러더스'를 결성하게 된다. 자니 브러더스는 1962년 당시 TBC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주말 프로그램 '쇼쇼쇼'에 전속으로 출연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제곡을 부른 것도 이때였다.

"예그린이나 자니 브러더스를 하면서도 재즈는 늘 하고 있었어요. 당시에는 재즈를 누구한테 배운다거나 가르쳐주는 곳도 없었고 재즈 공연을 하던 무대가 미8군 클럽뿐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재즈를 보고 배우며 불렀지요. 그때 유일한 재즈 공부방법은 미8군에서 흘러나오는 'Song Folio'라는 오리지널 팝송 악보가 있었는데 거기에 스탠다드 재즈 멜로디와 가사, 코드가 실려 있어서 그걸 보고 밤새 연습하곤 했지요."
그렇게 시작된 그의 재즈 인생은 50년이 훌쩍 넘게 이어오며 김준만의 독특한 창법 또는 스타일로 자리잡게 된다.

"오리지널 원곡을 벗어나서 내 나름대로의 리듬, 패턴, 코드로 바꿔서 내 스타일을 추구했어요. 1970년도에 'My Way'란 곡을 보사노바 스윙으로 리듬을 바꿔서 불렀는데 아마 세계에서 최초일거에요. 그 후에 미국의 유명 가수 폴 앵카가 그렇게 불러서 깜짝 놀랐어요. 우연의 일치겠지만 폴 앵카보다 앞섰다는데 자부심을 느꼈지요."

"재즈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그는 지체 없이 "영적인 치유가 있는 음악이고 가장 자유스럽고 민주적이고 창의적인 음악"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재즈는 불협화음이 용납되는 음악이에요. 찌그러지고 화음이 될 수 없는 음악을 연주할 수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궁 상 각 치 우'라는 우리나라 음악이 멜로디만 있고 하모니가 없어도 같이 협연할 수 있는건 오로지 재즈뿐이에요."

사람들이 재즈는 어려워하고 접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에 그는 "재즈는 심플하고 쉽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1940~50년대 미국의 만화영화 음악이 전부 재즈에요. 'Sing Sing Sing', 'Shoeshine boy'처럼 아이들도 쉽게 듣고 따라하는 곡이 재즈에요. 그런데 재즈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DJ나 PD가 '조금 난해하지만 들려드리겠습니다'라며 틀어주니 어렵게 느껴지게 된거죠."

그는 한국의 대중가요 '홍도야 우지마라', '번지없는 주막', '눈물 젖은 두만강', '꿈이여 다시 한번'을 재즈로 바꿔 1983년 'Korean pops in jazz'라는 음반을 냈을 정도로 재즈와 가요의 접목도 시도했다. 작곡가로도 역량을 발휘한 그는 패티김의 '사랑하니까', 장미화의 '내 마음은 풍선', 임희숙의 '그래도 설마 하고' 등이 대표적인 히트 곡들이다.

"음대 시절 어깨너머로 배운 작곡으로 곡을 만들었는데 1973년 장미화에게 '내 마음은 풍선'을 주면서 선후배 동료 가수들에게 곡을 줬어요. 지금도 늘 생활 속에서 일기처럼 곡을 만든게 3000여곡이 있어요. 물론 발표는 할지 안할지 모르죠."

백발의 멋진 수염이 트레이드 마크로 알려져 '재즈계의 신사'라 불리는 그는 1980년 1월 14일 생일 때부터 수염을 길러왔고 한 때는 광고 모델로도 유명했다.

"1973년인가 당시 제일모직이 골덴텍스 체크무늬 옷을 처음 시판하려고 하면서 누구를 모델로 할까 7~8명을 후보로 놓고 고민하다가 나를 선택했는데 내 광고 덕에 매출이 엄청 올랐다고 했어요."

지난 2010년에는 국내 재즈1세대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에도 출연하고 2012년에는 '재즈 재즈 재즈'라는 책도 출간한 그는 평안도 신의주에서 1940년에 태어 난 실향민이다. 그동안 두 차례의 암수술을 받으며 투병생활을 이겨냈고 2006년에는 4대독자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아들이 미국에서 36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하늘이 무너져 내렸고 우리 집안은 대를 잇지 못하게 됐죠. 잊으려고 노력하지만 지금도 생각나요. 암투병을 이겨내며 고마운건 역시 집사람이에요. 집사람이 해준 음식덕분에 살아났어요. 감사한 것은 큰 수술을 두 번씩이나 했는데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아직도 재즈를 부르고 있어요."

재즈 보컬리스트 김준의 남은 목표는 '재즈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일이다. "장학재단을 만들어 실력 있는 후배들을 도와주고 싶은데 제 힘으론 부족하고 기업에서 도와주면 좋겠는데 선뜻 나서는 데가 없네요. 그래도 열심히 찾아다니면 좋은 결과가 있겠지요"라며 공연을 위해 무대에 올랐다.

/여승철 기자 yeopo99@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