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 논설위원
▲ 김진국 논설위원
우역(郵驛)은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숙박시설이다. 신라 소지왕 9년(487)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나랏일을 하는 관리들이 묵던 곳이다. 고려시대엔 역참(驛站)이, 조선시대엔 관(館)·원(院)이 운영됐다. 모두 공문서 전달이나 공물 수송 등 공무를 보는 관리들을 위한 임시거처였다. 관은 외국 사신들이 머물던 공간이기도 했다. 태평관과 모화관은 명나라 사신, 북평관은 여진족, 동평관과 왜관은 일본 사신들이 드나들었다. 이와 별개로 식당과 주점, 여관기능을 겸비해 서민여행자들이 애용했던 점(店, 주막)이 존재했다. 나그네가 잠시 쉬어간다고 해서 봉놋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며 객주(客主)와 여각(旅閣)이란 새로운 여관이 등장한다. 객주는 육지 상인들을, 여각은 연안 포구로 모여든 상인들을 상대로 각각 숙박업을 하던 곳이다. 김주영의 장편소설 <객주>엔 보부상, 부패관리, 부상 등이 등장하는데 19세기 후반 한말 상인사회의 격변기를 묘사하고 있다. 1883년 개항 뒤 인천엔 새로운 숙박시설이 들어선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다이부츠(大佛, 대불)호텔'이다. 개항 이후 외국인들이 물밀듯 들어오면서 그들이 머물 시설이 필요했고, 일본 무역상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 ?~1898)와 그의 아들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 1870~?)는 발빠른 상술로 3층짜리 서양식 벽돌 건물을 짓고 외국인들을 받기 시작한다.

대불호텔이 쇠락하기 시작한 때는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하면서부터다. 처음 12시간씩 걸렸던 인천~서울 이동시간이 크게 단축되면서 외국인들이 인천에 머물지 않고 곧바로 서울로 간 것이다. 대불호텔은 그러나 북경요리 전문점 '중화루'로 변신해 1960년대까지 제2의 번성기를 누린다.
1978년 철거된 대불호텔이 본래 터였던 인천 중구 중앙동 1가에 재축(Reconstruction)돼 다음 달 '대불호텔전시관'이란 이름으로 부활한다. 사진을 보고 지은 외형은 옛모습 그대로이지만 내부는 고증이 어려워 전시실로 꾸몄다. 바로 옆에 인천 중구의 1960년대 이후 생활상을 담은 '생활사전시관'도 문을 연다. 관광인프라와 홍보마케팅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인천 중구의 호텔들이 이 새로운 문화시설 등장과 더불어 불황의 늪에서 빠져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