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철 문화체육부장
여승철.jpg
뮤지컬 '에어포트 베이비'는 미국으로 입양된 '조쉬 코헨'이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20년 만에 한국땅을 밟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박칼린 예술감독이 연출하고 직접 출연하기도 한 이 뮤지컬은 실제 입양아 2명의 사연을 참고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나는 어떻게, 어디서, 왜 태어났을까?'라는 뿌리에 대한 궁금증으로 한국을 찾은 입양 청년 '조쉬'가 우연히 들어간 이태원의 바에서 게이 할아버지 '딜리아'를 만나 함께 고향인 목포와 생모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한국의 해외 입양은 해방 이후 미군정 시대에 미군들이 한국인 여성과 동거하면서 낳은 혼혈아를 비롯해 한국전쟁을 거치며 생긴 전쟁고아, 정전 이후 전국 곳곳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크게 늘어난 혼혈아를 외국에 보내면서 시작됐다. 입양국가는 대부분 미국이었고 그밖에 캐나다, 호주, 스웨덴, 프랑스 등으로 보내졌다. 1953년부터 지난해까지 공식 집계된 해외 입양인은 16만8044명에 이른다.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입양인까지 포함하면 22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우리나라 해외입양 역사 가운데 인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해외 입양인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서재송 전 '성 원선시오의 집' 원장이다. 그가 입양 일을 한 것은 1966년 미국인 최분도 신부가 덕적도 성당 주임신부로 왔을 때부터다. 최 신부는 질병이나 조난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데려와 보살피기 시작했는데, 서 원장은 아예 보육원 '성 가정의 집'을 꾸리고 아이들을 아끼면서 키웠다. 그는 '성 가정의 집'이 인천 부평에 있는 보육원 '성 원선시오의 집'과 통합되자 본격적으로 혼혈아와 고아들의 해외입양에 나섰다. 그렇게 시작된 해외 입양은 1997년까지 계속됐는데, 서 원장과 최 신부 손을 거쳐간 해외 입양인이 1600명을 넘는다.

하지만 서 원장은 단순히 해외 입양에만 그치지 않았다. 해외 가정에 입양된 아이들이 나중에라도 혹시 부모를 찾거나 가족을 찾아 올 것에 대비해 그들의 사진과 이름, 성별, 생년월일, 주민번호, 본적, 주소, 보호자 연락처, 특이사항, 입양된 곳 주소 등을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 입양아동 출생 연도를 기준으로 1957~1996년 동안 1073건에 이른다. 그래서 지금도 600명 이상이 서 원장과 소식을 주고받으며 연락할 수 있었다.
특히 서 원장은 해외 입양을 보낼 때 자신만의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었다. 첫 번째가 형제나 자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집에 보내고, 두 번째로는 나이가 들어 중·고등학생이나 성인이 되어 입양되지 않으면 후견인을 찾고, 세 번째가 2년에 한 번 꼴로 미국을 방문해 거점 도시별로 입양아들을 만나는 시간을 갖고, 네 번째가 동양인 가정에는 되도록 보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서 원장의 원칙은 한때 '고아 수출국'이나 '아동 거래'라는 오명을 듣던 우리나라의 다른 해외 입양 사례와 비교할 때 한국 입양사에 귀중한 기록으로 남을 터이다. 입양인들은 물론 입양 부모 또는 한국의 부모나 가족들에게는 '따뜻한 보살핌'으로 기억될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의 입양인 커뮤니티에서는 '서재송 원장님을 찾아가면 본디 부모를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가족을 못 찾더라도 그 과정과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받은 상처를 치유 받는다'는 감사의 글이 입양인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한다.
서 원장의 해외 입양 자료는 111건 362점으로 정리되어 지난 17일 한국이민사박물관에 기탁됐다. 이민사박물관에서는 서 원장의 기탁 자료들을 목록화하고 조사를 거쳐 오는 8월부터 상설 전시 코너를 마련해 공개할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서 원장의 자료전시관은 '또 다른 이민'이라는 해외 입양인들이 성인이 된 뒤 모국을 찾아 그들의 기억을 돌아볼 수 있는 '따뜻한 자료'로 영원히 남게 된다.
서 원장은 해외 입양아들에게 꼭 강조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너희들은 버려진 게 아니다. 기록과 흔적이 남아 있다. 누군가는 너희들을 항상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