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려 수도 '江都'의 시대
개경 그대로 '복사'한 14개 건물
궁궐 뒷산 이름까지 똑같이 명명
몽골에 굴복 않고 지켜낸 '국통'
고종 승하 1259년 3중성 허물어

▲ 고려왕조는 1232년 강화로 천도한 뒤 내성·중성·외성의 3중성을 쌓고 몽골에 항전했다. 내성의 서쪽문인 '강화내성'의 전경.

에버리치호텔 (강화군 강화읍 화성길 50번길 43) 뒷쪽으로 난 등산로를 오른다. '남산'은 용흥궁공원~철종외가를 잇는 강화나들길 14코스에 속한 길이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솜털처럼 얹힌 노란 꽃잎들. 산수유, 개나리보다 먼저 피어난 생강나무꽃잎들이 산하에 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나뭇잎들이 "쏴-" 하고 파도소리를 낸다. 남산은 이제 막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가파른 길을 20분쯤 올랐을까. 장군의 모습 같은 고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서해안 방어를 담당했던 남장대다. 감시와 지휘소를 겸했던 남장대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허물어진 것을 2010년 재건한 것이다. 남장대에 서니 강화읍내는 물론 개성, 영종신도시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남장대에서 강화읍내 방향으로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뻗은 성벽은 강화산성이다.

1231년 몽골이 침입하자 고려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는 '강화천도'를 단행한 뒤 내성·중성·외성의 3중성을 쌓는다. 그 중 가장 안쪽에 있는 내성이 바로 이 곳 남장대에서 강화읍까지 연결된 강화산성의 일부 구간이다. 내성은 궁궐을 보호하는 3중성의 백미였다. 지금도 강화읍내를 둘러싸고 서문·동문·북문·서문 등 내성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다.

중성은 고종 37년(1250)에 쌓은 것으로 강화읍 옥림리에서 북산을 돌아 강화내성을 둘러싼 도성이었다. <고려사>는 중성의 둘레가 2960칸(약 5.4㎞)이었고 17개의 크고 작은 문이 있었다고 전한다. 외성은 승천포에서 남쪽 길상면 초지리까지 이어지는 24㎞ 구간이다. 높이가 7m, 상부 너비가 1.5m나 됐으며 누문과 수문이 각각 6개·7개씩 있어 '강화백리장성'이라고도 불렀다. 외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며 지금 그 자리엔 북한과의 경계선인 철조망이 쳐져 있다.

철옹성 같던 강화의 성들이 사라진 때는 고종이 승하하던 1259년이다. 고종이 눈을 감고, 친원파인 원종이 즉위하면서 몽골은 성을 허물 것을 요구한다. <고려사>는 '을유일에 성곽이 무너졌는데 소리가 빠른 우레처럼 여리(마을)을 진동하니 거리의 아이와 부녀자들까지 슬피 울었다'고 적고 있다.

왕실의 명에 따라 백성들은 손톱이 빠지도록 성을 쌓고, 허리가 휠 정도로 부숴야 했다. '강화도 사람들은 발가벗고 100리를 뛰어간다'. 이 말 속엔 강화도 사람들의 생활력이 강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섬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위태롭고 고단했는가 담긴 말이기도 하다.

3중성과 함께 고려왕실은 지금의 강화읍내에 개경의 것을 그대로 모방해 궁궐을 짓는다. 강안전, 경령전, 건덕전을 비롯해 14개 건물들의 건축양식과 이름을 개경의 궁궐과 똑같이 명명했으며 궁궐 뒷산의 이름까지 '송악산'이라 바꿔 불렀다.

3중성이 둘러싼 궁궐을 지었지만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일이었다. 고려는 본궁과는 별도로 강화도 곳곳에 임시궁궐인 '가궐'과 '이궁'을 세운다. 유사시에 왕이 피신하거나 머무는 거처였다. 정족산 가궐지와 마니산 이궁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정족산 가궐지는 전등사 경내에 위치하며, 마니산 남록 흥왕사터 부근엔 석축과 석탑부재가 방치돼 있다.

고려가 강화로 도읍을 옮긴 뒤 몽골은 고종임금에게 지속적으로 출륙을 강요한다. 고종은 그러나 1259년 강화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결코 몽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 강화도에 머무는 동안 고종은 내치와 국방은 무신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몽골과의 외교를 전담하며 고려를 지켜나갔다.

고종에 대해선 무신정권에 휘둘린 꼭두각시왕이라는 부정적 평가와 무신정권·몽골제국 사이에서 능란한 내치와 외교로 나라를 지켰다는 긍정적 관점이 공존한다. 객관적 사실은 고종이 몽골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고려 34명의 왕 가운데 46년간 재위한 최장수왕이었다는 점이다.

강도(江都) 시기의 의의는 수도를 옮기면서까지 '고려'라는 나라의 국통을 지켜냈다는데 있다.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만주의 금나라를 1234년 멸망시키고, 1279년엔 한족인 '남송'까지 정복한 거대제국 몽골이었다. 그러나 강화에 새 수도를 구축한 채 항전한 고려는 무너뜨리지 못 했다. 고려는 강화에서 나라를 구해냈고, 한민족의 역사는 조선으로 면면히 이어진다.

/글·사진 김진국 논설위원 freebird@incheonilbo.com



진짜 고려궁지는 어디?

십수년 발굴 작업 했지만 유구 못 찾아 …
돌출 구릉 가진 '궁골 일대' 가능성 제기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항전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시기'(1232~1270년)에 사용하던 궁궐터인 '고려궁지'는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관청리 405)에 위치한다. 이 곳은 이병도 교수가 '개경과 동일한 이름의 송악산이 강도에 있으며, 그 형세가 개경의 송악산과 비견된다는 점을 들어 고려궁지로 비정한 바 있다.

그러나 1995년~2008년 여러 차례 발굴 작업을 진행했으나 고려시대 유구가 확인되지 않으면서 고려궁지가 아닐 수 있다는 의문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됐다.

이상준 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소장은 '고려 강도궁궐의 위치와 범위 검토'란 논문에서 관청리 '궁골'일대가 고려궁지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의 개성시 송악동에 있는 고려시대 궁궐 유적인 '만월대'(滿月臺) 남북공동발굴조사에 참여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이 전 소장은 실제 고려궁지는 지금의 고려궁지와 강화향교 사이 '궁골일대' 라고 추정했다.
그는 개경궁성이 도성의 남북중심 축선에서 서편으로 치우친 곳에 입지하고 궁성의 동편에는 동지가 위치한다고 밝히고 있다. 궁성의 중앙부에는 탁월한 고도의 구릉이 남쪽으로 돌출돼 있으며, 이 구릉을 감싸고 두 줄기의 가치하천이 흘러 주류하천에 합수한다.

그에 따르면 강화의 궁골일대는 많은 청자들이 수습됐으며 중앙부에는 탁월한 고도의 구릉이 남아 있다. 이 구릉을 감싼 두 줄기의 하천은 남쪽으로 흘러 주류하천인 동락천에 합수된다. 따라서 지금의 고려궁지는 개경의 '동지'와 같은 성격의 연못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 전 소장은 "강도 궁궐의 위치는 강도도성의 북서편이면서 돌출 구릉을 가진 현재의 궁골 일대가 분명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왕수봉 기자 8989king@incheonilbo.com

인천일보·강화군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