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우 정경부 차장
"정치에서는 차용증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정치인들끼리 약속을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여당 소속의 한 국회의원이 최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한 말이다. 이 발언의 취지는 '정치인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얘기다.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이 말은 이른바 '국민'을 내세워 말 뒤집기를 밥 먹듯 하는 요즘 정치권의 인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지난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후보가 6월 지방선거와 동시에 국민투표를 실시해 개헌하겠다고 약속했다.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여야는 서로 '국민'을 앞세운 '개헌' 힘겨루기에 빠져 민생현안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인천지역 경제의 30% 안팍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지엠 문제조차 논의되지 않고 있다. 경쟁적으로 구성했던 각 당의 비상대책기구도 현재까지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급하게 소집된 한 야당 대책위에서는 "오늘 왜 회의를 소집했느냐?"고 한 의원이 묻자, 위원장이 "나도 모르겠다. 원내대표가 하라고 했다."고 답변하는 촌극까지 벌였다.

정치권의 개헌 다툼은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에 까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자치와 분권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어느 때보다 중요한 선거지만 국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야당이 대선공약을 뒤집지만 않았다면 이런 소모적인 갈등은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여당의 입장 뒤집기가 빌미로 된 사안도 있다. 야당이 정부의 추가경정예산안 처리를 포함한 4월 임시국회 일정 전면 거부까지 표명한 '방송법 개정안' 문제다.

KBS와 MBC 등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개선해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이 법안은 2016년 7월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인 박홍근 의원이 대표발의하고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 3당과 무소속 의원 등 162명이 참여했다.
당시 여당이던 자유한국당이 반대해 1년 넘게 표류했는데, 지금은 입장이 바뀐 민주당이 말바꾸기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2015년 두 배 가까이 올린 담뱃값 문제도 여야의 말이 바뀐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당장 불리하더라도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고 말하는 정치인을 국민들은 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