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원간섭기 고려의 자주 개혁
▲ 고려가 1270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80여년간 원간섭기에 들어간다. 이때 고려는 부마국으로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여야 했다. 1282년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가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옥등을 시주한 전등사 전경.
개경환도 이후 원 '부마국' 전락
변발 강요·공녀 요구·내정 간섭
1351년 공민왕 즉위 '반원 정책'
철령 이북 땅 되찾고 완전 독립


전등사 경내 전통찻집인 죽림다원. 통나무를 잘라 만든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봄꽃처럼 화사하다. 본래 '진종사'였던 이름이 전등사로 바뀐 건 고려 25대 충렬왕(1274∼1308 재위)의 비인 정화궁주가 1282년 옥등을 시주하면서 부터다. 1270년 개경환도 뒤 고려는 원의 부마(사위)국으로 전락한다. 원이 고려와의 결혼정책을 통해 충성을 보장받으려 했던 것이다.

1274년 6월 원종이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뒤 원나라에 입조해 있던 태자 심이 귀국, 충렬왕에 오른다. 정화궁주의 남편인 충렬왕은 이후 본처 정화궁주를 뒤로 하고 어쩔 수 없이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을 제1비로 삼는다. 남편을 빼앗긴 정화궁주는 수시로 전등사에 발걸음을 해 남편이 돌아오도록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한 뒤 몽골은 고려에 대해 직접 통치를 포기하는 대신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고려는 국통을 유지하고 풍속을 지킬 수 있는 대신 원(元·몽골)의 내정간섭과 경제적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원은 변발을 강요했고 공녀(貢女)까지 요구했다. 공녀는 고려말과 조선초기 원·명에 끌려간 여성을 말한다. 1275년부터 시작해 공민왕 초기까지 80여년 동안 수많은 고려여성들이 공녀로 보내졌다.

원나라 간섭기엔 '몽골풍'이 유행했다. 몽골의 풍습을 따르던 생활양식을 말한다. 장사치, 벼슬아치에서 '치'는 사람을 가리키는 몽골말에서, 임금의 음식상을 뜻하는 '수라' 역시 몽골어에서 비롯한 것이다. 만두, 설렁탕, 소주와 같은 음식도 몽골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몽골풍이 심화되자 승려 일연은 <삼국유사>(1285)를 저술해 고려인들의 민족성과 자주성 회복을 외치기도 했다. 고려의 풍습과 문화도 몽골로 전해졌다. 이를 '고려양'이라 한다, 원에 머물렀던 고려의 세자들, 공녀로 끌려간 고려여성들, 원에서 벼슬을 한 고려인들을 통해 전해진 고려의 복식, 상추쌈, 떡, 고려음악, 고려청자 등이 고려양이다.

원은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 등을 설치해 고려의 일부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도 했다. 중앙의 여러 관청을 축소하거나 폐지했으며 고려왕의 이름에 '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25대 충렬왕에서부터 26대 충선왕, 27대 충숙왕, 28대 충혜왕, 29대 충목왕, 30대 충정왕까지 모두 6명의 왕에게 충 자 시호가 붙여졌다.

원간섭기를 타고 '권문세족'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한다. 권세 있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이뤄진 이들은 원의 세력을 등에 업고 부와 권력을 유지한 사람들이다. 친원적인 성향이 강해 친원파 혹은 부원배라고 불렸다. 그러잖아도 약화돼 있던 왕권은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의 삶도 점점 피폐해져 가는 와중에도 원의 내정 간섭과 권문세족의 횡포는 31대 공민왕(1330~1374 재위) 전까지 계속됐다.

원이 쇠퇴하기 시작한 때는 14세기 중반 한족 농민 반란군인 홍건적이 봉기하면서 부터다. 이 시기 즉위한 공민왕은 반원 자주개혁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한다. 27대 충숙왕의 차남인 공민왕은 원 순제의 입조 요구에 따라 12~22세 연경에서 살다가 1348년 29대 충목왕이 사망하고, 30대 충정왕에 이어 31대 왕에 오른 인물이다. 즉위하자마자, 공민왕은 적극적인 반원 자주 개혁과 왕권 강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즉위한 해인 1351년 11월 이제현·조일신을 중심으로 한 인사이동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진 공민왕은 이듬해 1월에 몽골식 변발과 호복(胡服)을 폐지했으며 2월엔 권신을 중심으로 변칙적인 인사행정을 일삼던 정방(政房)을 없애버린다. 1356년엔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원의 연호사용을 중단했으며 관제를 3성6부제로 회복했다.

공민왕은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 일당도 처형시킨다. 기황후는 원에 공녀로 끌려간 뒤 원 순제의 눈에 띄어 1340년 올제이 후투그란 이름으로 제2황후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기황후의 권력이 막강해지자 오빠 기철은 온갖 권세를 부리며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것이다. 자신의 오빠가 처형당한 뒤 기황후는 고려 출신 최유에게 군사 1만을 내주어 고려에 보냈으나 1364년 최영의 군대에 참패당한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거침없이 추진됐다. 철령 이북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몽골 병력을 격퇴했으며 고종 말년에 원에 빼앗겼던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는다. 이때 쌍성 지방의 세력가였던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이 공을 세운다.

공민왕이 태조 왕건과 함께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왕으로 꼽히는 이유는 고려를 원의 지배로부터 완전하게 독립시키며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자긍심을 꽃피웠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몽골이었지만 고려를 정복할 수 없었던 것은 고려인들의 저항이 매우 끈질겼기 때문이다. 고려의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에도 삼별초가 3년간 항전한 것만 봐도 고려인들의 자주정신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원의 쇠퇴와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새로운 나라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글·사진 김진국 논설위원 freebird@incheonilbo.com


세계 여행 사이트에 뜬 '강화 투어'
대형 온라인 여행사 2곳 입점 … "2곳 추가 예정"

강화군이 대형 온라인 여행사에 관광상품을 입점시키며 올해의 관광도시 면모를 한껏 과시하고 있다. 온라인 여행상품(OTA·Online Travel Agency)은 최근 IT와 모바일에 친숙한 소비자가 많아지면서 트렌드에 민감한 세계 여행시장의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자유여행 상품이다.

이번 강화여행 상품은 1일 일정으로 서울에서 출발해 소창체험관, 관광플랫폼, 청년몰, 용흥궁 등 강화읍 소재 관광지로 짜여졌다. 여기에 평화전망대 관람과 화문석체험마을에서의 순무김치만들기 체험, 풍물시장 쇼핑이 더해져 알찬 여행을 만끽할 수 있다.

워터트리 온라인 여행사는 오는 5월10일 상품 운영을 개시하며,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 주 2회 운영한다. 현재 일본, 중국, 대만, 홍콩, 영어권 사이트를 오픈한 상태다. 주로 대만, 홍콩에 상품을 판매하는 TK트래블에서도 강화상품을 등록해 판매하고 있다. 전세계 120여개 도시에서 3만개 이상의 여행관련 상품을 예약받고 있는 아시아 최대의 액티비티 여행 플랫폼인 클룩(KLOOK)에서도 강화상품을 입점 확정했다.

군 관계자는 "일본 내 메이저급 OTA인 코네스트와 KKDAY 등에서도 곧 강화여행상품이 등록될 예정"이라며 "현재 강화군의 여러 지역에서 로케이션되고 있는 SBS 수목드라마 '스위치'와 한류배우를 활용한 단체여행상품도 일본 메이저 여행사와 협의 중에 있다"고 말했다.

/왕수봉 기자 8989king@incheonilbo.com

인천일보·강화군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