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인천일보 前 주필
'니체의 인간학'이란 책(다산북스 刊)이 있다. 일본사람 나카지마 요시미치(中島義道)가 썼다. 일본에서 세칭 '싸우는 철학자'로 불리는 이인데, 칸트 전문가로서 니체를 혐오해 왔던 그가 니체를 들고 나왔다고 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었다는 대중 철학서다.
칸트로서는 내리치지 못할 '서슬 퍼런 망치'를 그는 니체의 손을 빌려 휘두른다. "착한 사람만큼 나쁜 사람은 없다."고. 그 한마디에 머리가 띵 하다. 과연 그럴까? 착한 사람은 본래 선(善) DNA를 지닌 '지선(至善)' 자체인데 어찌 감히 나쁘다고 말하는가?

그가 말하는 '착한 사람'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곰곰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나카지마는 '착한 사람'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착한 사람은) 1 약자다. 2 안전을 추구한다. 3 거짓말을 한다. 4 무리를 짓는다. 5 원한을 품는다 등이다.
그중에서도 '약자'를 맨 처음 꼽았다. 스스로 '약자'라고 여기는 '착한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을 당연하다는 듯 내세우며 약자적 특권을 요구한다. 무능, 무지, 나태, 서툼, 인간적 결핍 따위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나는 옳다'고 항상 으스댄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양한 얼굴로 사회의 틈서리에 자리 잡지만, 결코 반성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약자의 무오류성'을 지적하면 집단으로 달려들어 상대를 비난하거나 구타하고 용서하지 못할 '제물'로 삼는다. 그게 약자(弱者)의 숨겨진 또다른 모습이라는 견해이다.

"폭력적인 약자의 목소리에 정부와 국회, 기업이 납죽 엎드려 설설 기고 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그 게으르기 짝이 없는 오만함에 조금도 저항하지 못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나카지마는 과감하게 지적한다. 이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닐 터이다.
이 선상에서 같은 일본사람 앤도 슈샤쿠(遠藤周作)의 명저 '예수의 생애'가 떠오른다. 그 책에도 약자의 무리인 '대중(大衆)'의 문제를 예리하게 살핀다.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착한 무리이기에 늘 옳으며, 타인과 함께 행동하는 데 전혀 의심을 품지 않는다. 이 견해는 "함께 행동하는 데 한없는 안락함과 기쁨을 느낀다. 착한 사람들의 올바름의 근거는 딱 하나. '모두'다. 모두가 틀릴 때도 있는데, 아니 모두의 생각은 대부분 틀린데, 그런 진리가 머릿속을 스치는 일조차 없다."는 나카지마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엔도에 의하면, 청년 예수는 자신이 대중이 원하는 혁명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대중에게 영합하지 않았다. 단독자로서 진리가 되고자 그는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렸다. 이는 '착한 사람들'이 '대중'이 되어 벌인 인류사적 사건이었다.

나치 히틀러 하의 독일 국민들, 태평양전쟁 시의 일본 신민들, 문화대혁명 때의 홍위병과 그 동조자들도 옛 유대인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는 궤적을 보였다. '착한 사람들'은 어떻게 무시무시한 '대중'이 되고, 광폭한 역사의 마당을 질주하는가 되묻게 된다.
"모두가 괴로워하는 것은 올바른 괴로움인가? 모두가 바라는 것은 올바른 바람인가? 모두가 그만 두기를 바라는 것은 그만 둬야 하는가?" 나카지마는 묻는다. 그에 준비나 한 듯 키에르케고르는 "대중은 진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