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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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심리적·사회적으로 성숙한가, 성적·정신적으로 건강한가. 그 기준은 본능과 욕구, 충동과 호기심, 분노와 적대감을 시기와 대상, 장소와 상황에 따라 '어떻게' '어느 수준'에서 '어떤 방법'으로 해소와 발산, 자제와 억제, 포기와 유예, 조절과 승화시킬 줄 아느냐에 달렸다. 특히 고통스럽고 파괴적 감정인 분노, 공격행동을 유발하는 분노, 좌절과 공격 행동을 이어주는 분노의 감정 처리는 개인과 국가·사회적 측면에서 매우 큰 상징성을 갖는다. 우리나라 가정, 학교, 사회, 직장, 언론, 정치 등 각 분야에서 분노의 감정 처리가 어느 수준인가에 대해선 만시지탄(晩時之歎)의 느낌이 크지만 냉정하게 성찰할 때다.
첫째, 제일 낮은 수준의 분노 감정 처리는 체벌이다. 신체적 구타나 폭행, 집단 따돌림뿐만 아니라 언론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의한 악의적·무차별적 인신공격, 무례와 모욕을 일삼는 가학적(加虐的) 마녀사냥식 행태도 대표적인 체벌에 속한다. 특히 분노감(anger), 적대감(hostility), 공격행동(aggression)을 뜻하는 'AHA증후군'에 해당되는 자들의 행동은 국가의 품격을 해치는 사회병리적 합병증이어서 더욱 경계해야 한다.

지금의 50대 이상 세대들은 학생 신분일 때, '가르침을 받을 때는 회초리가 필수'라는 의미의 교육적인 회초리(敎鞭), 그리고 군 생활에서는 '군기 확립' 차원에서 필수로 체벌이 주어졌고 또 받아들였다. 정치적 이유로 직·간접 체벌을 당한 사람이 YS와 DJ이지만, DJ는 정치 보복을 하지 않음으로써 지벌(智罰)로 대응했고, YS는 국민교육헌장을 폐기함으로써 당시 교육헌장에 참여했던 74명의 대표적인 석학(기초위원 26명, 심사위원 48명)과 국회의원 전원(1968년 11월26일 국회의 만장일치 동의)에게 인격적 체벌을 가한 셈이다. 교육의 방향으로서 지표를 정한 게 국민교육헌장이어서 어느 때 누가 발표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 전문가들로 하여금 진지하게 토론하면서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 수정·보완·발전시켰으면 지벌(智罰)로서의 슬기로운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였는데 분풀이를 해 버렸다. 그게 개인적 수준이며 감(感)으로 하는 정치이다.
둘째, 체벌보다는 한 수 위가 지벌(知罰)과 지벌(智罰)이다. 흔히 지벌(知罰)이라고 하면, '부지런 함'을 가르쳐 주기 위해 '몸에 밴 근면한 습관은 성공의 초대장이다'라는 글을, 정직을 가르쳐주기 위해 '정직을 잃은 자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라는 글을, 역경에 처한 사람에게는 '비록 환경이 어둡고 괴롭더라도 항상 마음의 눈을 넓게 뜨고 있어라'라는 글을, 교우관계가 좋지 않은 학생에게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고자 하면 그의 친구가 누구인가를 보면 된다'라는 글 등을 각각 100번씩 쓰라고 한다면 지벌(知罰)에 해당될 것이다. 또한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과 베드로 성당의 예술 작품을 보면서 탄성과 함께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천지창조'(천장화)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5년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을 완성하고 25년 후 환갑의 나이에 교황 바오르 3세로부터 '최후의 심판을 그리라'라는 명령을 받는다. 거대한 벽면에 6년의 작업 끝에 온갖 형상을 한 391명의 인간의 모습을 드러냈다. 해부학에 정통한 조각가여서 가능한 대작이지만, 준비·연구기간까지 포함한다면 '최후의 심판'은 9년이 걸린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 있다. 심지어 2000번 이상의 스케치를 했다고 하지 않는가. 교황 바오르 3세가 미켈란제로를 좋아했고 그를 최선을 다해 밀어준 관계이지만, 모함 때문에 죄인이 된 미켈란젤로에게 죄값으로 천장에 매달려 그림을 그리게 한 형벌(刑罰)은 체벌과 지벌(知罰)에 해당할 정도의 고역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자기 후원자였던 밀라노공국의 로도비코 스포르차의 요청을 받고 완벽한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위해 10년의 연구와 치밀한 준비를 거쳐 43세 때인 1495년에 그리기 시작해 3년 만인 1498년에 완성했다. 물론 예술과 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성베드로의 영광을 위한 집념·끈기·집중력·예술혼 등이 대작을 만들게 했지만, 지벌(知罰)·지벌(智罰)·체벌을 겸한 결과로 이 대작을 바라는 것은 왜일까.

그런가 하면 말레이시아 쿠아라룸프르 외곽에는 교도소가 있다. 미술가가 죄를 지어 재판을 받은 후 '수감생활을 하면서 교도소 담벽에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무더운 날씨에 교도소 담벽에 벽화를 그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수치스러웠겠는가. 그러나 힘들겠지만(체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작품을 남기니 지벌(知罰)일 수 있겠다. 재판관(교도소장) 수준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가정과 유치원·학교에서의 체벌 시비가 사라지고, 학생체벌 금지법의 찬반 논란, SNS에서의 무차별적 체벌성 폭력, 정치권의 분노 처리 등이 더 이상 소음공해로 국민들을 피곤하게 하지 않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