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병마(三千兵馬)골은 화성시 봉담면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봉담면 상리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삼천병마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삼천병마골이란 지명은 화성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때 신립(申砬) 장군의 휘하군대가 ‘삼천병마골(三千兵馬谷)-시흥시 조남동 남왕마을 서쪽-’에서 왜군을 대파했다는 기록과 설화가 전하기도 한다.
임진왜란때의 일이었다. 당시 조선 국토가 거의 왜병들에게 점령을 당하게 되자 선조는 의주(義州)까지 몸을 피하게 됐다. 진퇴양난의 위기에 봉면한 선조는 할 수 없이 명(明)에 구원병을 요청했고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李如松)이 군대를 이끌고 조선군과 연합해 국토를 회복하던 때였다.
이 때 전라도순찰사였던 권율(權慄)은 군대를 이끌고 오산(烏山)의 독산성(禿山城)에 이르러 왜장 가등청정과 맞서 싸워 전승을 거두었다. 왜병들은 이순신 장군에 의해 제해권(制海權)을 빼앗기자 육로를 선택했다. 그렇게 해 왜군이 타개책으로 독산성에 이르게 된 것인데 권율 장군과 싸움을 벌여 대패했던 것이다.
왜군의 입장에서 전세는 불리하고 소모전을 하다보니 예정된 시일보다 지체되는 것도 문제려니와 우리 조선의 군대와 명나라 군대가 한양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한다는 것을 알고 한양으로 올라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왜군은 대로를 피해 한양으로 가는 소로길로 접어든 것이 바로 독산성길이었다. 그러나 권율은 왜군을 섬멸하기 위한 작전으로 왜병이 지나갈 길을 예측하고 독산성에서 정남면을 지나 봉담면으로 통행하는 길목을 지키기고 있었다. 삼천에 이르는 군사를 말이다.
왜군은 마음놓고 삼천의 병마가 매복하고 있는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다. 꿈에도 조선의 군사가 매복하고 있으리란 예상은 하지 못하고서 말이다. 졸지에 조선군사들의 공격을 받은 왜병들은 뜻하지 않은 기습에 당황, 혼비백산하여 모두 도주했다는 것이다. 이 때부터 이 고개를 삼천병마골(三千兵馬谷)이라 불러오고 있다고 한다.
한편 시흥에 전하는 삼천병마골의 전설은 이렇다.
삼천병마골에서 왜군과 조선군은 대치를 하고 있었다. 서로를 잘 아는 터라 쉽사리 공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신립 장군에게 한 군사의 아내가 나서면서 말했다.
“장군님 제게 묘안이 있습니다.”, “무슨 묘안이 있단 말이냐? 어서 말하여 보아라.”
“적진에 쳐들어가려면 적군들이 잠자고 있는 틈을 이용하는 것이 상책 아니겠습니까?”
“제가 적진에 들어가서 ‘다자귀야’라 소리치면 공격을 하시고 ‘더자귀야’하면 자리를 지키십시오.”
그러고는 여인은 적진으로 향해갔다. 신립은 여인이 혼자서 적진에 들어가 적군을 동정을 살핀다 하니 믿음이 가지는 않았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일이 잘 되기만을 기다렸다.
여인은 적진에 들어가 “다자귀야, 더자귀야.”를 외쳤다.
그러자 왜군의 병사가 나타나 이 여인을 잡았다.
“누군데 이 밤중에 누굴 찾느냐?” 여인은 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사실은 내 아들이 둘이 있습니다. 큰 놈 이름은 ‘다자귀’요, 둘째놈은 ‘더자귀’인데 두 놈 다 전쟁터에 끌려가 생사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 찾으러 왔습니다.
“다자귀야, 더자귀야.” 이렇게 되자 그 왜군 병사는 이 여인의 입을 막으면서,
“모두들 고단해서 옷을 다 벗고 곤히 자고 있으니 소리 지르지 말아요. 우리 군사 중엔 그런 이름 가진 사람 없어요. 어서 저리 가요. 나도 곧 잠 좀 자야겠소.”
하면서 여인을 내몰았다. 이 여인은 짐짓 울음을 터뜨리면서 돌아섰다. 그러나 더 큰소리로,
“다자귀야, 다자귀야, 다자귀야.”
맞은 편에서 진을 치고 있던 신립 장군의 귀에도 이 소리가 들려왔다. 신립은 공격명령을 내렸고 이내 삼천병마골에서 왜군을 섬멸했다 전한다.
양 지역에 전하는 이야기는 다르나 ‘삼천병마골’이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여 생성된 지명일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라 하겠다. <김용국·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