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간의 이기심이 양산한 코로나19의 역습을 목도하며 많은 생각에 잠긴다. 인생은 희노애락을 거치면 한줌의 부토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그래서 당연히 문제 자체가 인생이고 인생 자체가 문제의 연속 스펙트럼이다. 다만 충격적인 문제들을 직면할 때 개인들의 성향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비생산적인 넋두리를 하고, 극심한 공포심을 갖기도 하는 것이 일반적 반사행동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를 정제시키고 이웃과 아름답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의 견지가 필요할까? 나는 그 고민의 또아리를 틀고 끝없이 생각한다. 내가 몇 해 전에 만났던 근원 김용준 선생이 떠오른다. 깊고 넓은 안목으로 나를 감화시켜주는 그의 저서 <근원수필>에서 답을 찾는다.

"가난이 가져다주는 운치, 퇴색해 버린 장지 도배, 스며드는 묵흔(墨痕), 완자창, 소담스런 휘멀건 꽃송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도 고요한 암향(暗香) …."<매화>편에서의 내용이다. 한편 '못생긴 두꺼비 연적을 사랑하는 이야기', '빈복(賓服) 차림의 매화를 사랑하는 철학자 X선생', '빙허 이태준 선생과의 만남', '반 고흐보다 더 기인이며 주광(酒狂)이었던 애꾸눈 화가 최북'과 '풍류의 수월도인(水月道人) 임희지 선생 이야기',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발견된 광개토왕 호우(壺 )에 대한 이야기' 등 읽어 갈수록 어느새 만면에 미소를 머금게 되고 한편으론 숙연함에 고개가 절로 주억거려지기도 한다.

선생의 관심사는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삶과 예술이다. "내가 수필을 쓴다는 것은 어릿광대가 춤을 추는 격이다 …. 다방면에 책을 읽고 인생으로서 쓴맛 단맛을 다 맛 본 뒤에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글이고서야 수필다운 수필이 될 텐데 …. 나는 남에게 해만은 끼치지 않을 테니 나를 자유스럽게 해달라." 수필집 후기에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입장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한편, 근원선생은 우리민족의 예술미를 각각 고구려의 웅혼, 신라의 장엄, 백제의 유려, 고려의 섬약과 비극, 조선의 순진과 소박한 미로 표현했다.

근원은 김용준 선생의 호이다. 선생은 1904년 대구 출신으로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귀국 후에도 조선화의 부활을 위해 애쓰신 분으로 서울대 미술대학장을 지내고 한국전쟁 당시에 월북하여 평양미술대 예술학 부교수로 북한 화단의 중심적인 조선화가(전통화가)로 활동하다 1967년 작고한다.

작은 문고판<근원수필>을 읽는 내내 홍조가 만연해지며 가슴에 무언가 꽉 차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한사람의 예술인으로서 보다 완성된 인격을 토대로 형성된 그의 사유, 즉 근원 선생은 고대철학자들의 형이상학적 미의 기준보다는 좀 더 명확한 미의 표준을 보여준다.

선생이 활동하던 시공간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 그리고 근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한국전쟁 시기였다. 그럼에도 선생을 비롯한 우리 민족은 슬기롭게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섰다. 항상 타인을 위할 줄 아는 대안적 사고방식과 행위들 그리고 함께 나눔으로 현현된 '인간애와 인간정신'은 국내를 넘어 세계를 아우르는 한류를 탄생하게 된 근본 토대가 된 것이다.

<근원수필>을 통해 끊임없는 성찰과 더불어 여유로운 관조, 그리고 예술에 대한 고고함과 완성된 인격을 유지했던 선조들과 그 찬란한 문화를 생각하며 이제 그만 나는 생각의 또아리를 풀어 놓는다.

사유진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