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물성(物性)'이 생각보다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꽤 크다고 느끼는 일이 있었습니다.

기사나 다른 글들을 뚝딱 잘 읽으면서도 종이책과 달리 E-북에 몰입하기 어려움을 겪으면서인데요.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를 사용하고 스마트폰을 사용한 지 오래됐는데도 말이죠.)

저는 한 사람의 목소리와 말투가 마음에 들면 그 사람의 이야기가 유독 재미있는 것처럼 손으로 만진 책의 질감 그리고 글씨체도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대한 호오(好惡)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 책을 펼칠 땐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처럼 긴장이 됩니다.

사람은 모두 각자만의 이야기를 담은 한 권의 책, 이라는 말도 있으니 제가 퍽 이상한 것만은 아니겠죠(?).

여전히, 아직 종이책이 더 좋은 취향을 가진 제가 오롯이 책의 공기로 충만히 채워진 곳이 있다 하여 다녀와 봤습니다.

 

내 안의 전원을 잠시 꺼두고 유영(游泳)하는 시간

 

도서관, 책방을 결합한 형태의 박물관인 책 박물관 열화당은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서 깊은 인문·예술 출판사 열화당에서 운영하는 곳입니다.

미술·사진·디자인·건축·전통문화 등 문화예술 분야 서적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꾸준한 기증본이 더해져 종이책의 '숲'과 같았습니다.

"종이책의 위기" "독서 대신 영상"이 화두인 지금 이 시대에 은연한 선율을 배경으로 제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존재해온 그들의 잘 다듬어진 이야기를 들으니 절로 겸허해졌습니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다정한 곳에서 느끼는 온기

▲ 열화당 책박물관 1층 서가는 미술·사진·디자인 등 시각예술 분야의 책들이 채우고 있고, 2층 서가엔 문학·철학·전통문화 분야의 책들이 빼곡하게 쌓여있습니다.

 

테이블마다, 그리고 책장마다 주제가 다른 1전시실은 현재 한국 문학을 테마로 꾸며져 있습니다.

이곳엔 광개토대왕비문, 삼국유사, 난중일기부터 조선 시대 여성 작가의 작품,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 외국과의 교류 속 한국 문학의 변화, 그리고 남한에서 발행된 북한 문학, 근대 문학, 현대 소설까지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전시 범위가 넓은 만큼 관람객의 관심 정도에 따라 학예사의 더 깊이 있는 안내가 제공됩니다.

무엇보다 제 눈길을 끌었던 것은 세심한 다정함이었습니다.

 

▲ 2023년 말까지 열화당 책박물관의 전시 주제는 한국 문학입니다. 일반 서점에선 접하기 힘든 비매품들도 전시돼 있어 보물찾기하듯 발견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영인본*과 나란히 놓여있던 번역본 때문입니다.

학예사가 추천하는, (의미 있는) 구절이 무슨 뜻인지 바로 찾아볼 수 있도록 번역본에도 가지런히 줄 그어져 있었습니다.

학예사는 익숙하지 않은 고어, 옛말로 향유하기 어려웠던 당대 문학이 단순히 수능 문제 속 지문으로서만 기억되지 않고 현대 소설, 시와 같은 '문학'으로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당대 문학이 민족적 주체성과 자의식,

무엇보다 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만큼

많은 분이 놓치지 않고 한 번쯤 읽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정혜경 열화당 책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영인본 : 원본을 사진이나 기타 과학적 방법으로 복제한 인쇄물 (출처-네이버 어학사전)

 

살아남은 기록은 역사가 된다

▲ 열화당 책박물관 제2전시실. 논어·유학에 관한 책부터 중국 사기·유럽의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의 책들이 꽂혀있습니다.

 

2전시실에 들어선 순간 오래된 책이 뿜는 분위기에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이곳은 가장 최근 발간된 책이 1970년대 잡지일 정도로 대부분 역사·국어 교과서 속 작품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용비어천가 영인본부터 세종이 지은 불교 찬가인 국보 월인천강지곡, 정철의 관동별곡 영인본에 그치지 않고 조선 시대 여성들의 한글 가사도 나란히 놓여있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의 한글 가사인 규방 가사의 경우 원본 그대로 전시돼 있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오는 동안에도 무척 소중하게 다뤄진 듯 상태가 깨끗해 무척 놀랐습니다.

 

"친정을 그리워하거나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노래한 규방 가사는

조선 시대 여성뿐만 아니라 과거 여성들에게도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힘이 돼

1970년대까지도 이 가사를 필사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정혜경 열화당 책박물관 학예연구실장

1900년대 초반 한글 소설 필사본, 육전소설들도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요.

근대식 활판 인쇄 기술 발달로 한 번에 여러 권씩 책 생산이 가능해지고, 무엇보다 한글 소설이 저자가 따로 없어 인세를 안 줘도 돼 가격을 낮춰 일반인들에게도 싼 가격에 책을 빌려주거나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한글을 몰랐던 이들은 이 책을 통해 한글을 배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1930년대 후반에는 학교에서 조선어, 즉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도 못 하게 했어요.

그때 이런 소설책이 교재의 역할을 한 것이죠.

생각보다 역사적 의미가 큽니다."

-정혜경 열화당 책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일제 강점기 시대에 나왔던 작품들과 해방 직후 나온 책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의 작품들까지 시대별로 나열된 책들은 격동의 시대 속 삶의 단상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전쟁 중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손 놓고 있진 않았어요.

격전지를 제외하곤 교육도 이뤄지고 신문도 발행되고 책도 만들어지고 있었죠.

모두 열심히 삶을 만들어가고 계셨습니다."

-정혜경 열화당 책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당신은 지금 책을 읽고 있나요?

▲  책이라는 물체는 생각보다 예민해 자주 꺼내 펼쳐주고 적절한 온도와 습도에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쾌적함을 느끼기 위해 창문을 열어 환기하거나 가습기를 켜는 것처럼 말이죠.

 

단어를 고르고 골라 문장을 단정히 가꿔 꽉 채운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진심이 담겨 있고, 이는 수많은 대상에 가닿게 됩니다.

이곳에 있는 수많은 진심 사이 여러분과 맞닿을 인연의 책이 궁금하진 않으신가요.

경험의 폭에 따라 비례하는 취향처럼 이 ‘숲’에서는 당신의 인연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2023년, 여러분의 서사가 담길 페이지가 보다 풍성하길 ‘무조건’ 응원하겠습니다.

/노유진 기자 yes_ujin@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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